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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에서 전성기를 보낸 카가와 신지

일본 국적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의 축구선수로

도르트문트에서 대활약을 통해

우승 커리어를 경험하고

맨유

이적에 성공한 선수이다.

 

클롭, 퍼거슨 감독 등

명장 밑에서 중용된 바 있으며

연계가 좋고

패싱력과 마무리 능력

좋은 편이라

특히 도르트문트 1기 시절에는

스탯에서도 놀라운 수준으로

많은 득점과 도움을

기록했다.

 

박지성에 이어

아시아 출신 가운데

유럽파로 우승 커리어가 가장 좋으나

맨유에서의

아쉬운 모습 이후,

점점 더 폼이 떨어지면서

현재에는 아쉬운 행보를 보이는 중.

 

 

 

 

팀을 1부리그로 끌어올리다

2부리그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다

2006년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했고

팀이 2007년 강등을 맞이하게 되면서

2부리그에서 뛰었다.

 

그곳에서

주전으로 뛰면서 

꾸준하게 활약상을 보여주었고

2009년 시즌에는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등

물오른 득점 감각을 보여주면서

팀을 1부리그 승격까지

이루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때에 활약상으로

독일 분데스리가 다수의 클럽은

카가와 신지에게 관심을 보였고

2010년 7월,

도르트문트가 

비교적 굉장히 저렴한 이적료를 통해

그를 영입했다.

 

세레소 오사카 시절 

130경기 57골

 

 

 

도르트문트 우승의 주역이 되다

당당히 리그 우승의 주역이 되다

10-11 시즌부터

도르트문트 소속으로 합류 했으며

카가와 신지가 유럽 진출 후,

가장 찬란했던

전성기 시기라 할 수 있다.

 

데뷔전부터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던 그는

중요한 경기였던

유로파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데뷔골과 함께 멀티골을 기록하게 되면서

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알린다.

 

그리고 리그에서도

곧장 데뷔골을 기록하더니

꾸준한 득점 페이스를 보여주면서

전반기에만

10골 2어시스트

스탯을 기록하며

적응기도 필요없이 분데리스가에

녹아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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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기에는

아시안컵에 출전하여 부상을 당하며

많은 시간을 빠져 있었는데

그럼에도 전반기에

보여준 임팩트가 강했다는 점에서

키커가 선정한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당당히 선발되었다.

 

첫 시즌 기록이

28경기 12골 2어시스트였으니

카가와는 확실히 팀에 녹아들었고

무엇보다 도르트문트 전술에서

카가와가 연계플레이

담당하고 스스로 마무리까지 지어준다는 점에서

클롭 감독에겐

이쁜 선수일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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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시즌에는

카가와의 활약은 더욱더 눈부셨다.

에이스 역할을 하던

누리 사힌이 이적했으나

오히려 유망주 괴체와 함께 팀의 중심이 되어

화끈한 공격을 이끌었고

 

카가와는

시즌 초반 부진과 함께

중요한 기회를 여러 번 날리면서

비난의 대상이

된 시기도 존재했으나

곧장 정신을 차리고 스탯을 쓸어담으며

도르트문트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즌에

43경기 출전 17골 13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총합 30개의 공격 포인트

아시아 선수로써는

놀라운 수치와 함께

팀의 리그 우승에 이바지했고

11-12 시즌에

보여주었던 카가와의 퍼포먼스

아시아 선수 중에서도

역대급에 꼽힐 수 있는 대활약이었다.

(하지만 손흥민이 나오고선 뭐....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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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와의 매서운 활약으로

도르트문트 구단은 장기계약을 권유하며

그를 앉혀 놓으려 했으나

무서울 것이 없는

그는 더 큰 무대로 이적을 준비했고

아시아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EPL

새로운 무대를 생각하고 있으며

예전 박지성이 그랬듯이

퍼거슨 감독은

카가와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접촉하게된다.

 

그리고 2012년 6월,

카가와는 맨유 입단이 확정되었으며

박지성에 이어서

아시아 선수가 맨유에서

활약하는 순간이 되었으며

당초에는 비어있는 등번호 7번을

받을 것이라는

의견이 존재하기도 했으나

26번을 배정 받았다.

 

 

 

 

맨유로 이적, 결과적으로는 실패

퍼거슨의 부름, 하지만 그가 은퇴했다

구상은 나쁘지 않았다.

루니가 원톱에 서고 그 뒤의 공격을

카가와가 담당하는

플랜이 짜진 상황.

 

하지만, 맨유는

불안했는 지 아스날로부터

반 페르시를 급작스럽게 영입하게 되면서

카가와의 자리가 날아갔다.

반 페르시가 원톱에 서고

카가와가 설 자리에

루니가 자리하게 되면서

주전에서 밀린 것.

 

물론, 자신이 영입한 선수들을

잘 관리하고

충분히 기회를 주는 퍼거슨 감독의

스타일답게 카가와는

꽤나 많은 기회를 부여 받았으나

활약상은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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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본인이 원하는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는 

넘사벽 루니가 확실히 자리를 잡았고

그렇다고 윙 자리에도

나니, 발렌시아

주전 선수들이 있다는 점에서

카가와가 쉽사리

맨유에서 자리를 잡는 게 쉽지 않았다.

 

리그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번뜩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일시적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고

무엇보다 큰 경기에서는

중용을 받지 못하는 등

첫 시즌, 도르트문트에서 보여주었던

장점들을 발휘하지 못하며

아쉽게 시즌을 마감했다.

 

26경기 6골 6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그나마 맨유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개인적으로

유럽 무대에서 3시즌 연속

우승 커리어를 달성했다는

의미있는 기록을 달성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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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즌 후,

퍼거슨 감독이 은퇴를 선언하게 되면서

모예스 감독은 피지컬을

중시하는 감독이라

철저하게 카가와를 배제했다.

 

더불어 그나마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윙어 자리에는

유망주 야누자이

포텐이 터져 버리게 되면서

출전시간을 

나누어 먹는 신세.

 

맨유로 이적한

후안 마타까지 동포지션에 있다는 점에서

카가와는 갈 곳을 잃었고

기회가 주어지면

뭐 경기력은 그렇다치고

공격형 미드필더로 

스탯이 없다는 점은 더 심각하다.

결국 2번째 시즌은

최악이라는 평가와 함께

시즌을 마감했고

머지않아 맨유를 떠나게 되었다.

 

 

 

 

도르트문트 복귀, 재기라 말하기 힘들다

어느 순간, 폼이 떨어져버렸다

1700만 파운드로

맨유 입단에 성공했던 카가와는

800만 파운드의 이적료

다시 독일로 돌아갔다.

 

복귀 후,

초반에는 스탯도 쌓아주는

원래 보여주던 모습들이 나와주면서

기대감을 높였으나

후반기로 갈수록

부진의 늪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었고

도르트문트 팬들에게도

클롭의 양아들이냐

부진에 대한 비난을 받았다.

 

첫 시즌,

38경기 6골 10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막판에 결정적인 역할을

여러 번 보여주며

다음 시즌을

그나마 기대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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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 시즌은

그래도 제대로 반등했다.

원래 자신이 달았던 23번을 달면서

도르트문트 1기 때 보여주던

플레이가 나오기 시작.

 

이 해에는

분데스리가 100번째 경기를 돌파했고

정말 꾸준한 활약으로

시즌 말미에는

분데스리가 베스트11

공격형 미드필더 부분 후보에 오르며

기량을 인정 받았고

시즌 스탯은

13골 12어시스트.

 

하지만, 그 후로

조금씩 폼이 떨어지기 시작한

카가와는 주전에서 밀리는 등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기 시작했고

간혹하다 경기에 출전하여

활약하기는 했으나

시즌내내 그 활약이

이어지기엔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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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설이 있었으나

팀에 잔류했고 카가와는 18-19 시즌 겨울까지

도르트문트에서 뛰었으며

구단 내에서도

좋은 자원들이 영입됨에 따라

그의 출전시간과

입지도 더 줄어들어갔다.

 

욕심이 있는지

유럽무대에 남는 걸 선호하고 있으며

구단에서도 이적료를

최대한 낮추어

그의 이적을 도모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결국

1월 마지막 날,

겨울이적시장을 통해

임대이적을 통해 팀을 옮겼다.

 

 

 

 

그 후의 조금은 아쉬운 행보

현재는 그리스 리그에서 뛰고있다

터키 리그로 떠났다.

베식타스와 계약을 맺었으며

그 후의 행보는

경기력이나 스탯에서도 볼 수 있겠지만

부진의 연속이다.

 

14경기 4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고

시즌이 끝난 후,

도르트문트로 복귀했으나

방출 되었고

스페인 2부리그

레알 사라고사로 이적했다.

 

유럽에서 계속 뛰었던 이력 때문인 지

일본 복귀나 중동 등

아시아 리그에서

뛰는 것보다

어떻게든 유럽에 남아서

반등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장면.

하지만 그곳에서도 부진했고

스페인 2부리그에서도

경기력이 안나오면

끝이 아니겠냐는 부정적인 시선들이

다수 존재했다.

 

그리고

2021년 1월,

겨울이적시장을 통해

레알 사라고사를 떠나 그리스 리그

넘어가게되었다.

하지만 폼이 너무 떨어졌고

부상까지 겹치게 되면서 경기 감각이

둔해진 모습과 함께

점점 더

힘든 시간들이 이어지는 중이다.

 

 

 

 

국가대표로써의 카가와 신지

일본 대표팀, 등번호는 10번

19세의 나이에

유망함을 인정받아 국대에 데뷔했다.

하지만 2010 남아공월드컵

최종 엔트리는 탈락했고

연습생 신분으로 함께 동행은 했다.

 

대표팀내내

혼다와 함께 에이스는 누구냐라는

비교대상이 되었고

결론적으로

대표팀에서 더욱더

활약도가 좋았던 선수는 혼다.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멀티골을 기록하며

팀을 3:0으로 이끌게 되면서 국내팬들에도

카가와는 크게 남게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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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첫 월드컵 출전을

2014 브라질월드컵으로 이룰 수 있었지만

최악의 부진으로

득점없이 워스트11에

뽑힐 정도로 아쉽게 마무리했다.

 

카가와는 분명

일본을 대표하는 유럽파이자

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선수였으나

이상하게 국대에서는

영향력이 적은 편.

 

그리고 감독에 따라

전술에서 배제되는 등 아쉬운 시기들이

존재하는 상황 속에서

할릴호지치 감독이

그를 구상에서 제외하게 되면서

2018 러시아월드컵 출전이

좌절되는 듯 했으나

감독이 경질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반등하여

월드컵에서 첫 경기에 득점하는 등

좋은 활약을 통해

일본의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16강에서 만난 벨기에와의 경기에서

2:0까지 앞서갔으나

저력을 발휘한

벨기에에게 2:3 역전패를 당하며

일본의 월드컵은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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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후,

세대교체 바람이 불었는 지

일본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뛰었던 선수들을

대거 교체하며

새롭게 명단을 꾸렸고

당연스레 카가와도 제외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국대에 승선하지 못하고 있으며

사실상 국대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해도 될 상황.

 

A매치 97경기 31골

 

 

 

 

카가와 신지에 대한 TMI

 

 

 

01. 공격형 미드필더의 롤을 제대로 수행했다

 

카가와의 전성기는

역시 도르트문트 1기 시절이다.

이 때의 카가와는 쳐진 스트라이커와도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활약을 했는데

양발을 잘쓰고 연계 플레이가 좋으며

스스로 마무리하는 능력까지

준수하기 때문에

정말 많은 스탯을 기록했다.

더불어, 쓸데없이 공을 오래 가지고 있는

욕심이 적기 때문에

공의 흐름도 빠르게 유지하며

이타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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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단점은 피지컬과 전술 활용도의 한계

 

일단 왜소하다보니

아무래도 피지컬적인 면이나

포지션 위치에 비해 헤딩과 제공권에서

한계를 보인 단점이 있다.

더불어, 연계 플레이를 즐겨쓰는 팀 전술에서는

최적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윙어를 활용하고

간격을 두고 플레이를 펼치는 전술에서는

극도의 부진을 보이며

전술 활용도에 한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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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나카타와 비교대상이다

큰틀에서 보자면

나카타와 카가와의 플레이 스타일이나

포지션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두 선수를 비교하는

일본의 팬들이나 언론이

굉장히 많은 편이며

아무래도 임팩트가 강했던 나카타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는 편이다.

한국의 박지성-손흥민을

비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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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혼다와도 비교대상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두 선수는

포지션도 비슷한 편이라

계속해서 비교대상이 되는 편이었으며

혼다가 아무래도

국대 활약도가 더 좋다보니

더 높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인지도가 평가는

아무래도 도르틈문트, 맨유 등

빅클럽에서 뛰었던

카가와가 더 우위에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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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박주호와 친분이 있다

도르트문트 시절을 함께 뛰면서

친해진 케이스로

서로 훈련 이후에도

시간이 되면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는 등

친하게 지냈으며

맨시티에서 뛰고있는

귄도간까지해서

셋이서 굉장히 잘지냈다고한다.

각자의 개인 SNS을 가면

함께 찍은 사진이나

서로의 생일을 축하해주는 등

친분을 지금까지도

잘 유지하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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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박지성을 존경한다 밝힌 적이 있다

인터뷰를 통해

대한민국 박지성을 존경한다고

밝힌 적 있으며

아무래도 아시아권의 선수들은

유럽의 선구자와도 같은

역할을 했던

박지성 선수에 대한

존경심을 왠만하면 다 가졌을 듯 하며

카가와 같은 경우에는

맨유의 선배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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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손흥민에 대한 언급도 했다

카가와는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손흥민을 지목하면서

독일을 넘어 영국 무대에서도

성공한 그를 보며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했다.

더불어, " 카잔의 기적 " 으로 불리는

대한민국과 독일의 경기를 보며

자극을 제대로 받아

16강 벨기에전을 

준비했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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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클롭의 애제자였다

사실상 카가와가

도르트문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클롭 감독을 만나 중용되며

날아올랐기 때문이다.

뭐~ 클롭 감독이 그를

제대로 활용한 것도 주요했겠지만

카가와도 실력이 있고

감독과 선수로

궁합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다.

후에, 맨유에서 실패 후

도르트문트로 돌아와 카가와가 부진하자

팬들은 그를 비난하며

클롭의 양아들 아니냐는 말까지

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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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후안 마타 자선 프로젝트에 동참하고있다

후안 마타가 만든

자선사업체에서 자신의 연봉 1%를 

매년 후원하는 프로젝트에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로 참여하고 있으며

맨유에서 함께 뛰면서 동참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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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카가와 신지 통산성적

 

<도르트문트>

분데스리가 2회

DFB-포칼 2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리그 1회

FA 커뮤니티 실드 1회

 

<PAOK FC>

그리스컵 1회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아시안컵 1회(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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